17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문득 생각납니다.
딸만 넷이었던 우리 집에서 아버지는 유난히 장녀였던 저에게 마음속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셨습니다.
어린 시절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 중 하나가 있습니다.
“너희 시대에는 여자도 장관이 되고 대통령도 된다.”
그 당시만 해도 제게는 너무 먼 이야기처럼 들렸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늘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영국의 마거릿 대처 수상 이야기를 하시면서, 앞으로는 남자와 여자라는 이유로 기회가 제한되는 시대가 점점 사라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버지는 단순히 여성의 사회 진출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의 가능성과 자유에 대해 이야기하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우리나라에도 첫 여성 대통령이 탄생했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기대와 희망을 품었습니다.
저 역시도 우리 사회가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의 역사를 우리는 모두 알고 있습니다.
기대했던 모습도 있었고, 실망스러운 모습도 있었습니다.
정치적 입장을 떠나 시간이 지나며 깨닫게 된 것이 있습니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한 사람의 등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남자 대통령이냐 여자 대통령이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떤 가치와 어떤 마음으로 나라를 이끌어 가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정치만의 이야기가 아닌 것 같습니다.
가정도 그렇고, 교회도 그렇고, 사람과 사람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직책과 위치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인격과 삶의 모습입니다.
아버지가 말씀하셨던 “여자도 장관이 되고 대통령도 되는 시대”는 단순히 여성의 사회 진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는지도 모릅니다.
누구나 자신의 능력과 가능성에 따라 꿈을 꿀 수 있는 사회.
남자이기 때문에, 여자이기 때문에, 혹은 어떤 배경을 가졌기 때문에 기회가 제한되지 않는 사회.
서로를 존중하며 자신의 생각을 말할 수 있고, 노력한 만큼 도전할 수 있는 사회.
아마도 아버지는 그런 세상을 바라보셨던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마주하는 대한민국의 현실을 보면서 여러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람마다 느끼는 것은 다를 수 있겠지만, 지금의 사회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과연 얼마나 자유롭게 생각하고 말하며 꿈꿀 수 있는가를 돌아보게 됩니다.
억압과 통제가 강해지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는 새로운 가능성이 자라나기 어렵습니다.
사람들은 점점 눈치를 보게 되고, 자신의 생각을 숨기게 되며, 도전하기보다 침묵하는 것을 선택하게 됩니다.
그러나 자유롭게 생각하고, 자유롭게 도전하며, 서로의 다름을 인정할 때 비로소 새로운 가능성도 열리게 됩니다.
건강한 사회는 서로를 억누르는 사회가 아니라 서로를 세워 주는 사회일 것입니다.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귀 기울여 듣고, 경쟁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성장할 수 있도록 격려하는 사회 말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아버지가 하셨던 말씀을 조금 더 깊이 이해하게 됩니다.
아버지가 바라셨던 것은 여자도 대통령이 되는 세상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기회가 주어지고 사람의 가치를 존중하는 세상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옳은 말에 귀 기울일 수 있는 사회.
서로를 인정하고 격려할 수 있는 사회.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보다 “함께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품는 사회.
다음 세대가 더 큰 꿈을 꾸고 더 넓은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사회.
어쩌면 아버지가 바라셨던 세상도 그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세월이 흘러도 아버지의 목소리는 여전히 제 마음속에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 말씀은 제게 작은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사람은 떠나도 사랑으로 남겨 준 생각과 가치들은 오래도록 기억 속에 살아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됩니다.
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지금의 시대를 보며 어떤 말씀을 하셨을지 문득 궁금해집니다.
오늘은 유난히 아버지가 그립습니다.